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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아래서] 풀 수 없는 방정식

고즈넉한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 사이로 움직이는 별이 보일 때가 있다. 유성처럼 빠르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이 별은 바로 비행기다. 비행기는 수백 톤의 강철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는 또 수십 톤의 사람까지 싣고 있지만 하늘을 난다. 그 육중한 몸이 뜰 때마다 놀랍다.   더 놀라운 일은 우리는 지금도 비행기가 어떻게 뜨는지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양력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전문가에 의하면 양력을 설명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이 있는데, 날개 주변에 발생하는 난류와 유동이 너무 복잡하여 이 식으로도 완전하고 고유한 답을 구하지 못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깔끔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리라. 사람이 만들고도 사람이 다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도 비행기는 하늘을 난다. 생각할수록 경이롭다. 다 알지 못해도 우리는 이 커다란 금속 덩어리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오르는 장엄한 광경을 감탄하며 즐길 수 있다. 함께 타고 날 수도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완전히 알아야 하늘로 날 수 있다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하늘뿐이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조차도 이를 설명하기 위해 똑같은 방정식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공식을 몰라도 우리 얼굴에 부딪히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즐거워한다.     우리는 자주 세상에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 때문에 불안해한다. 그 이유를 알려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도 묻는다. 마치 방정식의 답을 찾듯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모든 설명을 듣고 싶다. 알기만 하면 해결할 듯이 답을 찾지만, 사실은 알아도 해결할 힘이 없을 때가 거의 전부다.     정말 이유를 몰라서 불안한 것일까? 사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에 이해에 매달리고, 그래도 알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은 아닌가? 자기가 원하는 답을 만들려고 문제와 출제자까지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그토록 배반하고, 떠나고 돌아서지만 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지 설명할 수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우리가 갚아야 할 눈물과 한숨까지도 짊어지시는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왜 나를 사랑하시는지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우리를 감싸고, 그 사랑은 우리를 인내하며, 그 사랑은 우리를 일으킨다.   사랑은 우리의 무지를 넘고 우리의 계산을 부수며 우리의 가슴에 부어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방정식 스토크스 방정식 금속 덩어리 우리 얼굴

2024-12-02

[등불 아래서] 섬김을 받았으니, 이웃 섬겨야

어떤 운동선수가 제자리 점프를 가장 잘할까. 당연히 농구 선수가 떠오른다. 얼마나 잘하면 스카이 워커나 에어라는 애칭이 붙었겠는가. 그런데 답은 역도 선수라고 한다. 오히려 농구 선수들도 점프를 더 잘 뛰려고 역도 선수들의 훈련을 받는다는 말에 놀란 적이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들이 의외로 우리를 놀라게 할 때가 있다. 아마존의 정글을 보면서 우리는 이곳이야말로 지구의 허파라고 당연히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지구에는 이미 충분한 산소가 있을 뿐 아니라 따로 허파가 필요 없다. 아마존이 만든 산소는 아마존의 생물들이 거의 다 소모해 버린다. 오히려 아마존의 진정한 가치는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붙잡는다는 데 있다. 지구 탄소 소비량의 2~5%(매년 10~20억 톤)를 흡수한다니 환경 보존을 위해 너무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지구의 허파가 아니라 지구의 콩팥이나 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신앙생활에도 의외성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매우 자연스럽다.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헌신한다. 일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헌신이라고 쓰는 단어가 아이러니하다는 것이다. 헌신이란 몸과 마음을 드린다는 뜻이 아닌가. 내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것인데 누가 누구에게 드릴 수 있을까.   언어유희가 아니라면 우리의 헌신이란 우리 것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실을 확인하는 일이다. 내 것으로 잘못 알고 맘대로 쓰지 않겠다는 확인이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섬긴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더해 드릴 것은 없다. 제물을 바쳐서 신에게 아부하는 일을 성경은 우상숭배라 부른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으신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품에 안고,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함께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바치셨다. 그 하나님이 오늘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시고, 울어주시고, 함께 속상해하시고, 웃으시고, 내 발을 씻으시며 당신을 섬기신다. 그렇게 섬김을 받았으니, 그와 같이 우리도 이웃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이웃 농구 선수들 역도 선수들 지구 탄소

2024-10-07

[등불 아래서] 헌신도 함정이 있다

어느 마을에 농부가 있었다. 마침,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았다. 너무 기뻤던 농부는 아내에게 "이렇게 복을 받았으니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자"고 말했다. 몇 개월이 지나 송아지를 모두 장에 내다 팔려고 가는 길에 그만 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져 죽고 말았다. 농부가 가슴을 치며 말했다. "아 하필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다니"   조금은 치사한 우리의 마음을 보여주는 우스개다. 그럼 "모든 것을 드린다"는 말은 어떤가. 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표현이 아닌가? 믿음의 대상에게 무언가를 바치는 일과 이를 받은 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주는 일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제물을 가져가서 제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며 신에게 비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한다. 성전을 짓고 제물을 바치는 것이 신을 섬기는 방식인 것이다.   정말 하나님은 제물이 필요할까? "내가 설령 배가 고프더라도 너희에게 달라고 말하겠느냐? 온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다 나의 것이다." (시편 50:10-12)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를 내보내서 제물 만들어 오라고 시키는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 왜 읽기도 어려운 제사 이야기를 성경에 적어놓았을까? 제사와 제물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쪼개지고 태워지는 제물처럼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리고 이 약속을 십자가에서 지키셨다.     우리는 갖다 바치면서 신을 섬기는 일에 익숙해 있다. 왜냐하면 두렵고 불안해서 우리가 만든 신들이기 때문이다. 신앙을 지닌 이들조차도 갖기 쉬운 오해는 우리에게 생명을 포함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손으로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예배당을 화려하게 짓고 우리의 정성이라고 부른다. 아닌 것처럼 기도하면서도 봉사와 선교를 하나님 앞에 천국 가는 보험처럼 바친다.     격화소양이라는 말이 있다. 신발을 신고 가려운 곳을 긁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살피지 않고 우리의 최고를 바치려는 모든 시도는 다름 아닌 격화소양이다. 시원할 리가 없다.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우리 안에 오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물은 우리의 상한 심령이다. 주님께 나아오는 유일한 조건은 아픈 마음이요, 지친 어깨요, 자신의 연약을 보는 눈물이며 말조차 하기 힘든 탄식이다.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살게 하는 이유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헌신도 함정 헌신도 함정 농부가 가슴 제사 이야기

2024-09-09

[등불 아래서] 도떼기시장

주변에 '세일'이라는 말이 많이 들리거나 보이면, 평소에 사려던 물건을 구매할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지만, 경기가 어려워지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속이 뜨끔하기도 한다. 요즘은 발로 품을 팔아 세일을 찾아다니지 않고 손가락이 고생하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세일을 찾아 인터넷을 기웃거리다가도 옛날 시장같이 좁은 골목길에 좌판처럼 물건들을 늘어놓고 북적거리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중에도 이것저것 없이 물건을 쌓아놓고 어깨를 비벼대며 걷던 요란했던 시장이 있었다. 바로 '도떼기시장'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구경처럼 따라다닌 그곳은 없는 것이 없었고, 쌓아놓은 물건들은 어린아이의 눈에 신기 그 자체였다.     제일 놀라웠던 순간은 그렇게 정신없이 쌓아놓은 물건들 속에서 기가 막히게 찾는 물건을 내어놓을 때였다. 한겨울에 노란 여름 티셔츠를 찾던 손님도 놀람이었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쌓인 옷들 속에서 밑장을 빼던 아저씨의 무심한 손길도 아이에게는 경이로움 자체였다.   우리 마음도 도떼기일 때가 있다. 내 마음이 분명한데 아무렇게나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도무지 풀기 어려운 때가 있다. 선비처럼 고고한 척하지만, 사실은 난장을 치는 중이다. 내 마음이지만 모르는 속이 더 많기 때문이다. 평안은 어디 던져 놓았는지 찾을 길이 없고, 못난 내 얼굴만 광고지처럼 마음에 가득 붙어있다. 쌓아놓은 물건들은 도통 알아볼 수조차 없는데 좌절이라는 상표에 실망이라는 가격표만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시끌벅적하고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듯해도 속을 아는 이에게는 정돈된 서랍이다. 내게는 엉켜진 실타래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물건이라도 내 속을 정말 아는 이라면 그 속에서 사랑이라는 옷을 찾아내고 기쁨이라는 넥타이도 꺼낼 수 있다.   “주님께서는 나를 살펴보셨고 나를 아십니다. 내 내장을 지으시고 나를 만드셨습니다. 내 생각을 밝히 아시고 내 모든 길도 아십니다. 보소서 내 혀의 말 중에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옷 가게가 분명했는데, 어머니는 뜬금없이 스팸을 찾으셨고, 눈을 슬쩍 맞춘 아저씨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것이 분명한 통조림을 가게 뒤쪽에서 가져오셨다. 정말 없는 것이 없구나!   내 마음속에서 평화와 위로를 찾아내실 뿐 아니라, 내게는 도무지 없을 것 같은 용기와 승리까지 들고 오신다. 정말 없는 것이 없구나! 이 주님이 나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꺼내 주신 분이다.   나에게 어지럽기만 한 내 마음은 주님께는 정돈된 서랍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도떼기시장 우리 마음 가게 뒤쪽 옛날 시장

2024-08-05

[등불 아래서] 문을 활짝 열라

매년 기록을 경신하는 더위에 이상기후라는 말도 정상이 되어버리는 요즘이다. 올 봄은 왜 이리 춥냐고 집어넣은 겉옷을 꺼내던 날이 엊그제인데 이제는 에어컨이 없으면 여름이 도통 비켜주질 않는다. 사무실 주인은 여름이 아니라 에어컨이다.   그런데 문을 열고 가만히 숨을 고르며 늦은 오후에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반소매로 드러난 팔을 금방 싸늘하게 만드는 것이 에어컨이지만, 머리카락 사이까지 새로운 숨을 넣으며 지나가는 바닷바람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한다. 도시 속 빌딩에서야 힘들지만, 소박한 평상에서 맛보는 '함께 사는 여름'이다. 문을 닫은 바람과 문을 연 바람은 이렇게 다르다.   에어컨은 문을 닫아야 켤 수 있다. 우리가 만드는 바람은 문을 닫게 만든다. 그런데 에어컨이 세게 돌수록, 콧물도 나고 머리가 아프며 오한에 열까지 난다. 이럴 때 전문가들이 항상 말한다. "문을 열라".   교회는 열심이 필요한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헌신을 드린다. 우리의 헌신이 없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못하실 것처럼 그렇게 열심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다 우리도 모르게 문을 닫는다. 은혜를 그렇게 바라면서 우리가 만든 바람만 찾는다. 감동과 눈물, 강한 믿음과 헌신, 봉사와 여러 행사를 구하고 좇다가 오한이 나고 숨이 가쁘고 메말라가고 머리가 아프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밖에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고, 내 열매가 무엇인지 헛갈린다면, 의심해 보라. 문이 닫혀있지 않는지.   주님을 밖에 세워놓고 문을 닫은 채 부리는 열심은, 나 자신을 땔감으로 삼아 태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자라면 누가 예수님을 부르지 않으며, 하나님을 찾지 않겠는가. 그러나 막상 그 주님은 우리의 주가 아니다. 내 감동, 내 섬김, 내 열심, 내 평안이 내 주인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은혜조차도 받는 내가 주인이다.   그러나 회개 없는 은혜는 신발을 신은 채로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이다. 주님이 없는 열심은 문을 닫아 놓고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의외로 문은 열지 않은 채 에어컨이 싫다고 꺼버리는 이들도 있다. 에어컨 바람에 열광하다가 냉방병으로 고생하는 이나 그건 아니라면서 목마름도 모르고 고생하는 이나 문을 닫고 살기는 마찬가지다. 은혜는 원하나 회개하지 않고, 겸손은 원하지만 낮아지지 않고, 사랑은 원하지만 자신의 손은 내밀지 않는다.   나 주를 믿노라고 그 이름 부르나 문밖에 세워두니 참 나의 수치라.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에어컨 바람 헌신 봉사 머리카락 사이

2024-07-08

[등불 아래서] 엿장수 맘대로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두 사람이 어깨를 스치며 다녀야 했던 골목길이 갑자기 공터를 만나는 곳이 있었다.     집안에 벼슬을 하셨던 조상이 있었을 커다란 한옥 대문 앞이었다. 그 기와집 처마 밑을 지키셨던 뽑기 할머니, 여름이면 어김없이 나타났던 에펠탑 빙수차, 겨울을 지켜주던 가게 앞 호빵 찜통들이 터줏대감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엿장수도 공터를 채워주던 단골이었다.   딸그락거리는 가위질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달려가 숟갈 총 부러진 것, 대꼬라지 떨어진 담뱃대, 병이라면 박카스 병까지 몽땅 들고 나왔다. 멀쩡한 양은 냄비를 들고 나온 녀석까지 온통 손수레에 숨겨진 엿을 보려고 까치발을 세웠다. 고사리손들이 가져온 고물을 밀어 넣으면 엿이 되어 나왔다. 그렇게 받자마자 입에 넣고는 없어질세라 하루 종일 오물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가져다 바친(?) 고물들은 참 사연 많은 것들이었다. 전쟁의 포화를 견뎌냈던 숟가락, 심지어 일제를 지나온 양은 냄비도 있었으리라. 닿고 깨어지고 부러지고 구멍 나버린 쓸모없고 모자랐던 고물들. 다 가져가면 달콤한 엿이 되었다.   마치 수고하고 무거운 우리들 인생을 가져 가면 달콤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처럼 말이다. 꼬리를 물다 보니 불경하게도 예수님이 엿장수가 되셨다. 하지만, 목수셨는데 엿장수면 또 어떠하리. 우리를 향해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며 우리의 모든 험한 인생을 받아주시고, 달콤한 주님의 은혜를 주신 분이니 말이다.   가끔 고물로도 쳐줄 수 없는 것을 들고 올 때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 쓸데없는 천 쪼가리를 가져와 그저 엿과 엿장수 얼굴만 바라보는 쑥 들어간 간절한 눈을 엿장수는 외면하지 않았다. 대팻날을 세워 헐렁한 가위로 엿을 쳤다. 그것도 우리에게는 짧은 한가락이었는데 긴 두 가락짜리로 말이다. 철없던 우리는 왜 얘는 더 많이 주냐고 따지기도 했다. "이 녀석들아, 엿장수 맘대로다"   요즘은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을 엿장수 맘대로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만난 엿장수는 배를 곯던 퀭한 눈에 맘대로 엿을 주던 아저씨였다. 주님을 만난 이들은 고물조차 못 되는 인생을 엿으로 바꿔 먹은 사람들이다. 달콤하고 살살 녹는 주님의 사랑을 오늘 아니 평생 그리고 영원히 오물거리는 사람들이다.     뭐라도 사라지면 엿 바꿔 먹었느냐고 묻곤 한다. 우리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는 날이 온다. 그날 말하리.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엿으로 몽땅 바꿔 먹었다고.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엿장수 엿장수 맘대로 엿과 엿장수 양은 냄비

2024-05-27

[등불 아래서] '사점(Dead Point)'의 교훈

대중목욕탕 사우나에 가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모래시계를 세워 놓곤 한다. 모래가 반쯤 차 있는 초반에는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래표면이 서서히 내려가지만 마지막 1cm 정도를 남기고는 모래가 순식간에 흘러내린다. 모래시계의 지름이 줄어들다 보니 속도가 빠르게 느껴지고 지루함도 덜 수 있다.     등산이나 마라톤을 하다 보면 숨이 멎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를 '사점(死點ㆍDead Point)'이라고 한다. 이 고비를 지혜롭게 넘기면 한동안은 편안하게 등산과 마라톤을 지속할 수 있다.   필자는 가끔 정원 관리를 한다. 오랜만에 전기톱과 예초기(소형 엔진을 이용해서 날을 회전시켜 풀을 베는 도구)를 둘러메고 일을 시작하면 10분도 안 되어 근육이 아파온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무리해서 하다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쩌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보면 어느 새 근육통은 사라지고 2~3시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을 할 수 있다. 사점과 비슷한 원리라고 짐작해 본다.   돌아보면 영어나 자전거 서예와 그림을 배울 때도 비슷했던 것 같다. 초반의 지루함과 어려움을 어느 정도 감내하고서야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배우는 속도도 빨라졌다. 만약 초반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사우나를 나와 버렸거나 근육통을 참지 못하고 전기톱을 내려놓았거나 영어 자전거 서예 그림을 포기했다면 보람과 성취감은 덜했을 것이다.   평소 알고 지내는 노스님께서 치매 예방을 위해 법문 암송을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법문 한 페이지 분량을 외우는데 한나절이 걸렸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은 30분이면 완벽하게 외울 수 있다고 하신다. 경이로운 인간의 적응력이다.   수 년 전 원불교 신문에 매주 교리에 관해 연재를 한 적이 있다. 주변에서는 매주 한 편씩 쓰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느냐며 걱정해 주셨지만 사실을 한 달에 한 번 쓰는 것보다 매주 쓰는 것이 수월한 측면도 있다.     프로 작가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필자의 경우는 책상에 앉는다고 바로 글이 써지지는 않는다. 초안을 구상하면서 뇌의 구조를 '글쓰기'에 적합한 모드로 바꿔야 하는데 이 과정이 실제 '작문'하는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 보통은 1~2시간이 걸리는 이 과정이 매주 글을 쓰는 경우에는 10분 정도로 짧아진다.       무슨 일이든 처음 하는 일은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데에는 몸도 마음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 과정을 넘지 못하고 포기를 하게 되고 이 과정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취와 보람의 열매를 향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포기 안한다고 무조건 성공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리하게 등산을 하거나 전기톱으로 작업을 하다 보면 큰 사고나 부상의 위험도 있을 수 있다. 단 모든 일에는 극복 가능한 사점과 사점 이후의 보람과 성취가 있음을 새겨 볼 일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등불 아래서 point dead dead point 자전거 서예 영어 자전거

2024-05-06

[등불 아래서] 세상이 그려놓은 선

학교를 다녀와서 다시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되던 시절, 방과 후 골목길은 여름 한날의 더위도 식혀주던 놀이터였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오징어를 하자, 아니 사방 치기를 하자고 엄지를 추켜세우며, 여기 붙으라고 소리치는 합창 소리가 쟁쟁했습니다.   조금 밥그릇 수를 더 쌓았다고 고학년들은 무기를 챙겨서 나옵니다. 구슬과 딱지로 무장하고는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나름 살벌한(?) 각오를 다지며 골목길에 등장합니다. 삼각형을 그리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주머니에서 구슬들을 꺼내 놓습니다. 딴에는 오케이 목장의 결투보다 진지합니다. 엄지 구슬로 선후를 정하면 비장한 삼각형이 시작됩니다. 쪼아 찍기, 깔 패기, 날라 찍기. 이름도 화려한 초식들이 등장하고 탄식과 한숨 그리고 웃음소리가 골목을 점령해 갑니다.   오늘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눈에 힘을 주며 구슬을 노려보지만, 상대방은 염소가 날름날름 종이를 집어먹듯이 구슬을 따갑니다. 그때마다 소년의 눈빛은 점점 내려앉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그때 갑자기 큰 환호와 탄식소리가 터졌습니다. 잘나가던 상대의 엄지 구슬이 삼각형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이제껏 먹은 모든 구슬을 토해내야 하니 그 억울함과 통쾌함에 골목이 떠들썩해집니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인생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려놓은 삼각형 밖으로 밀려나면 구슬은 죽습니다. 땅에 그린 선이 무슨 힘이라도 있는지, 사방 치기도 오재미도 그렇습니다. 선을 밟아도 죽고, 선 밖으로 나가도 죽습니다.   세상이 그려놓은 선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뒤처지는 것이고, 좌절이며 인생의 실패라고 부릅니다. 여전히 땅 위에 있지만, 구슬은 더는 놀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지만, 내일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죽어버린 구슬들은 그렇게 내일을 잃었습니다. 그때 엄지 구슬이 삼각형 안으로 선을 넘어들어왔습니다. 엄지 구슬은 죽었고 다른 구슬들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우리들의 소원이 그랬나 봅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아이들의 삼각형에도, 오징어 놀이에도, 술래잡기도 다방구에도 살펴보면 회생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집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향해 돌아서듯 다시 사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도, 착한 일도 나를 지으신 이가 없다면 어찌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받았지만 자기가 한 듯이 자기 것처럼 살아가니 이것이 바로 자신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선 밖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죽기 위해 선 안으로 들어온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나는 그래도 더 예쁜 구슬이어서 살았다고 스스로 속지 않도록, 하나님 자신이 선을 넘어와 죽으셨습니다. 남보다 나은 깨달음도, 앞서는 능력을 가진 나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믿음입니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엄지 구슬로 구슬과 딱지로 오징어 놀이

2024-04-01

[등불 아래서] 너는 행복자로다

남가주 지역의 산들이 눈으로 덮였다.     차가운 빗줄기를 뚫고 목련은 꽃을 피웠다. 올해도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도 봄은 소매를 붙잡는 겨울을 뿌리치고 오지 않는다. 봄은 겨울의 손을 잡고 온다. 단단해진 땅도 앙상해진 가지들도 모두 잡고 온다. 차가운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고통과 함께 황홀한 봄은 온다. 봄은 행복하다.   지치고 메마른 앙상한 가지를 품었기에 봄은 행복하다. 그리고 여기 아픈 가시가 돋아나 자신마저도 찌르는 우리를 뿌리치지 않고 가슴에 안아 따스한 싹을 틔운 우리의 봄이 있다. 이 봄은 아픈 우리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봄이다. 행복한 봄, 행복한 사람, 예수님이다.   윤동주의 시처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다.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이고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이 행복한 아들로 아버지는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가시가 돋아난 우리를 안으셨기에 행복하시다. 성령님은 앙상한 우리를 위해 지금도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시기에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밖에 모르는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으시고, 바늘도 꽂히지 않는 단단한 내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기에 괴롭지만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겨울을 뿌리치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홀로 영광과 존귀를 모두 받으시며 행복하실 분이지만, 십자가 위에서 영광이 아니라 우리의 수치를 품으셨다. 존귀가 아니라 우리의 불의를 품으셨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의를, 그의 모든 지혜를,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그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행복을 가졌으니 말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하기에 아프고,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하기에 힘들다. 무례하지 않아야 하기에 고통이고, 시간의 터널을 버텨야 하기에 고독하다. 무시당하기도 하기에 억울하다.     그래도 우리는 겨울을 뿌리치지 않는다. 아파하는 가시들을 예수님과 함께 품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 지르는 추운 가지들을 싸맨다. 끝나지 않는 것 같고, 세상이 이길 것 같다. 불의는 배부르고, 거짓은 칭송을 받는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이 행복하셨던 그 길을 간다. 자신에게 말해 본다. 그래, 행복하게 가자.   우리 안에 행복한 하나님이 계신다. 홀로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를 품으셔서 행복한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주의 구원을 너와 같이 얻은 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이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로다 (신 33:29)."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행복자 남가주 지역 주의 구원 자기 목숨

2024-03-04

[등불 아래서] 왜 열심을 내는가

훈련이란 우리 자신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절차탁마 즉 자르고 쓸고 쪼고 간다고 말했다. 위나라를 번창시켰던 무공이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자신을 수양하고 경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모습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돌을 제련하여 결국 금을 만드는 과정과도 같아서 자주 고통과 고난을 동반하기에 연단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렇듯 갈고 닦아서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 내려고 할까.   요즘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자아가 중요한 때가 되었다. 그래서 자기 계발이 넘쳐나고 이를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에서 '무엇이 당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17개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여기에는 한국도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은 압도적으로 '가족'을 꼽았다.     한국은 달랐다. '경제적 부'가 최우선에 올랐다. 한국 사람들이 자기 계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쏟는 진짜 목적이 물질적 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절차탁마이든 대기만성이든, 과정만큼이나 그 목적지도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열심히 절차탁마해서 도착할 곳이 의외의 장소일 수 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훈련하고 연단하라고 말한다. 신자들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심지어 이것도 경쟁하듯이 남보다 앞서려고 애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토록 훈련하는가.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연단이고 훈련인가. 자기 수양은 훌륭한 일이지만, 더 나아진 내가 모든 것이라면, 결국 모든 영광은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내가 목표라면 내가 빛날 것이다.   하나님의 훈련은 나를 다듬어서 빛나게 하는 절차탁마가 아니다. 오히려 나를 빛나게 다듬으시는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광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인정받고, 빛내려고, 남보다 나은 내가 되려고 자신을 닦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라면 이미 영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형상을 다시 얻으려는 내가 아니라, 누리고 즐거워할 나인 것이다.   하나님의 훈련은 우리를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고 그분을 의지하게 한다. 내가 나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열심 모두 하나님 여론조사 기관 사도 바울

2024-02-05

[등불 아래서] 설레는 사랑 오늘부터

새해 첫날에는 떡국을 먹는다. 긴 가래떡을 엽전 모양으로 자른 떡 위에 색색으로 얌전히 고명을 얹는다. 오방색을 띤 고명은 식욕을 돋우려고 음식 위에 얹는 것인데 이를 달리는 교태(交胎)라고도 불렀다. 처음 벗하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이 음식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새것이라는 말이고, 이제 벗을 만나듯 사귀라는 뜻이니 가히 대단한 운치가 아닐 수 없다.     고명이 음식을 새롭게 만난다면 새로운 해를 만나는 것은 설이다. 예전에 설이라면 음력 새해 첫날이었지만 이제는 양력설도 챙긴다. 설은 시작하는 날을 말하지만, 어떤 학자는 ‘낯설다’의 어근인 설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설은 시작하는 새로운 날이고 낯선 시간에 발을 디디는 날이다.     낯선 벗을 만나 사귀기 시작하는 날. 새롭고 낯설기에 두렵고 불안하다. 새로운 것만 낯선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이 새겨놓은 무거운 짐들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섦으로 우리를 두렵게 한다. 아픔이란 아무리 만나도, 만날 때마다 낯설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낯선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이기도 하다. 우선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이 주는 설렘이 있다. 또는 우리를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뜨게 하는 설렘도 있다. 그래도 우리를 가장 설레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토록 어둡고 무거운 시간,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곁에서 걸어주던 사랑. 갑자기 등불을 켜고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했던 사랑. ‘울어라. 마음껏울어라’ 하며 눈물을 받아주고 다음 날 햇살을 비춰주던 고요했던 그 사랑. 내가 그 선한 품에 안겨있는 것도 모르고 잘난 줄 알다 넘어질 때, 두려워 말라 너는 내 품에 있다고 놀라게 하셨던 그 사랑. 그 낯선 사랑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새해 첫날은 낯선 사랑을 기대하는 날이다. 낯선 사랑과 사귀기 시작하는 날이다. 익숙해지지 않는 그래서 우리를 항상 놀라게 하시는 선하신 주님으로 설레는 날이다.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어두운 짐조차도 친구로 만드시는 그 사랑을 만난다. 익숙해지지 않는 놀라움으로 항상 설레게 하는 사랑을 만난다.   그래서 오늘이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렘도 없고 색깔도 없는 고명이 아니라, 국 속에 섞여서도 맛을 내고 향을 뿜어내며 아름답게 모양을 내어 여전히 낯설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주님의 날이기를 바란다. 어둡고 무거운 짐조차도 누르지 못하는 주님으로 놀라고 설레는, 올 한해 내내 우리를 붙잡고 가실 사랑, 그 사랑과 사귀는 시작이 오늘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사랑 사랑 오늘 음력 새해 엽전 모양

2024-01-01

[등불 아래서] 우리의 뒷배, 하나님

세상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실력이다. 돈이나 학벌이나 외모만이 아니다. 감동이 있다면 내 인생 이야기까지도 실력이 되는 시대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실력이다.   그래서인지 살면서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서럽다"라는 말이었다. 이 말이 속으로 얼마나 한이 되었는지 교회에서도 "하나님이 너의 빽이다. 기죽지 마라"는 말을 꽤 들었다.   실지로 온 우주를 지으신 찐 부자 하나님께서 내 뒷배라는 사실에 힘을 얻기도 했다. 무엇이 걱정인가. 우주 최고의 부자가 내 아버지이신데. 그래서 이 부자 아버지가 인색하게 구시는 날이면 분노했다. 그렇게 세상 돈 다 가지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 왜 나한테는 이러시냐고 눈을 치떴다. 그래도 하나님은 무서워서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기는 했지만 말이다.   뒷배란 겉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보살펴 주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의 뒤에서 나를 보살펴주는 하나님. 그런데 만일 당신이 이런 뒷배 하나님을 만났다면, 애석하지만 지나치시라. 그는 하나님이 아니다. 당신이 하는 일을 무조건 응원해 주고, 묵묵히 바라봐주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아름다운 뒷배라도 하나님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뒷배 하나님은 실은 이름만 바꾼 당신의 욕심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욕심과 싸우실 터이니 뒷배가 아니시고, 당신이 원하는 것이 진리라면 함께 가실 터이니 뒷배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우리를 뒤에서 묵묵히 도와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의미 있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시고, 우리의 인생이 되신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신다. 그래서 주님이시다.     세상은 하나님을 뒷배로 삼으라고 계속 가스라이팅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없는 것이 실력이다. 돈이 없어서 실력이고 학벌이 없어서 실력이다. 내 인생이 밋밋해서 실력이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만드는 모든 것이 실력이다.   오해하지 마시기를. 좋은 학교, 소중한 경력,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버는 돈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이 단어들 앞에는 "자랑할"이란 말이 붙는다. 자랑할 돈이 없는 것이 실력이고, 앞세울 학벌이 없는 것이 실력이다. 하나님만이 내 자랑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 빽이 아니라, 내 전부이시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목사 / 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하나님 부자 하나님 인생 이야기 부자 아버지

2023-12-04

[등불 아래서] 먼지 한 톨도 무겁지만

예전에 아침 등굣길은 버스에 올라타려고 뛰어가는 순간부터 숨 막히는 전쟁이었다. 더는 도저히 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이들은 버스 안으로 빨려 올라가고 문을 닫지도 못한 안내양들은 마지막 잎새처럼 난간에 매달려 숨 고르기를 했다. 운전기사의 전설적인 S자 운전을 기다리는 것이다.   한쪽으로 사람들을 기막히게 몰아버리는 순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두를 밀어 넣으며 문을 닫는 기술은 아침부터 비명과 함께 경탄을 자아냈다. 흰 장갑을 끼고 숨을 몰아쉬던 누이들은 지금 생각해 보니 겨우 서너 살 더 많았던 정말 삶을 치열하게 살던 전사들이었다.   피곤함에 지쳐 한 정거장에서 쪽잠을 청하다가, 조금 늦게 문을 열었다고 막무가내 승객이 퍼붓던 한 사발 욕을 다 먹기도 했다. 그렇게 꿋꿋해 보이던 그녀는 한 승객이 "그러니 왜 잠을 자. 서울까지 뭣 하러 와서는"이라는 말에 돌아보지도 못하고 조용히 서럽게 울었다.     설상가상. 눈 위에 서리가 내린다는 이 말은 원래 더해 봤자 표도 안 나는 잔소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가벼운 서리가 무거워졌다. 엎친 데 덮친다는 뜻이 되었으니 말이다. 정말 힘들 때는 먼지 한 톨도 무거운 법이다.   우리도 모두 인생의 무게를 지고 걷는다. 한마디 말이 먼지 같지만, 그 먼지로 무너지기도 한다. 그 말이 연자 맷돌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문가에 서서 서럽게 울던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금세 눈을 훔치고는 '오라이'하며 씩씩하게 버스 옆구리를 치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얼굴을 고치려고 꺼냈던 조그만 손거울. 그리고 그 뒤에 붙어있던 가족사진.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작은 손거울 뒤에 붙은 가족사진이 힘차게 '오라이'를 외치게 했다면, 우리 인생을 홀로 두지 않고 그 어깨에 우리를 짊어지는 분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외칠 수 있을까? 내 인생을 짊어진 그 분이 눈 위에 다시 내린 서리를 어찌 짊어지지 못하겠는가? 나의 상처를 자기 심장에 새긴 분이 어찌 먼지 한 톨을 함께 새기지 못하겠는가.   내 인생의 거울. 그 거울 속에는 내 얼굴만 있지 않다. 예수님의 얼굴이 있다. 먼지 한 톨도 무겁고, 상처 하나도 아프지만 주님은 넉넉하게 우리 인생을 모두 짊어지신다. 주님이 나의 발자국이 되어 주시는 인생이라면 우리도 힘차게 '오라이(all right)'라고 외치자. "주님, 모두 괜찮고 모두 좋습니다. 앞으로 가세요. 함께 가겠습니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목사 / 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먼지 우리 인생 모두 인생 버스 옆구리

2023-11-06

[등불 아래서] 나보다 아래는 없다

어릴 적 부모님들의 관심은 성적이었다.     전쟁과 가난으로 공부에 한이 맺히신 분들도 많았고, 자식의 성공으로 자신을 찾으려는 분들도 있었다. 아이도 덩달아 공부를 잘하는 것이 벼슬이었다. 자라 보니 세상은 더 조건을 찾았다. 결국, 나를 인정받고 빛내기 위해 더 많은 조건이 필요해졌다. 좋은 스펙을 쌓는 일이 왜 나쁘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나와 내 조건이 한 인격을 세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스펙이 인간에 앞섰다.   애석하게도 신앙도 그런 조건처럼 되지 않았나 싶다.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세상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조차도 필요하면 쓸 수 있는 나를 위한 '아빠 찬스'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가진 여러 조건 중 하나가 아니다. 내 인생을 위한 뒷배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심지어 성숙시키기 위한 능력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환경이나 선물 혹은 행복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이시며 우리 인생의 의미가 되시고 내 기쁨이며 나의 행복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우리의 만족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한 시인은 기도하고 노래했다.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   신학자 본 회퍼는 유혹의 본질을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우리와 피조물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으로 보았다. 반짝이는 금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하면, 별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기쁨을 위한 들러리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신앙은 나를 빛내려는 장식물이 되었다. '믿음이 좋은 나, 기도 잘하는 나, 잘되는 나, 성경을 많이 아는 나'가 되었다. 겉으로 그럴 듯 빛나 보이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자기 부인이 아니었던가. 내가 만든 사과나, 가게에서 사 온 배를 달아 놓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화려한 이력들을 더덕더덕 더 붙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 이력과 신념, 자랑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이웃을 나보다 높게 여기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 그대로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다. 나보다 아래는 없다. 이 겸손이 자기를 낮추사 제자들의 발을 만지며 씻으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마음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통계가 아니다. 업적도 능력도 아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며 정의를 행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당신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오늘날 신앙 업적도 능력 아빠 찬스

2023-10-02

[등불 아래서] 빌려쓰는 오늘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지구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손으로부터 지구를 빌려 쓰는 것이다."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이 말은 1971년 웬델 베리가 최초로 쓴 표현이 변화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우리 것이 아니라 우리 자손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니 틀림없는 사실이고, 잊지 말아야 할 생각이다.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멋져 보여도 미래 우리 자손들을 생각하며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어떤 이는 "빌려 쓰는 것인데 갚을 능력이 없다면 이는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 갚을 능력이 있을까. 오용하고 파괴할 능력은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회복하고 복구할 능력이 우리에게 정말 있을까. 근본적으로 묻는다면 지구가 본래 우리와 우리 자손 것이었는가.   돌이켜 보면 우리 것으로 생각하는 여기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우리가 겪는 '우리의 위기'를 '지구의 위기'라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 마음 밑바닥에는 지구의 주인이 당연히 우리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지구는 아쉬울 것이 없다.   출발선을 다시 그어보자.   "주님이시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님께 속하였으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님의 것이로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또는 우리 자손의 것을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쓰고 있다. 그러니 지구를 고치려면 하나님을 생각하며 계획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청지기다. 그런데 이 말은 자주 하나님 것이니 조심 또 조심하며, 항상 주인 눈치를 봐야 한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우리가 빌려서 쓰는 것이 어떤 나라인가. 우리가 망치고 파괴할 세상이 아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세상이고 하나님의 나라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오늘 구하고, 오늘 즐기며, 오늘 누린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왜 먹고 마시는 것에 앞서는가. 먹는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비장한 군사가 되는 것이 다는 아니다. 의롭고 아름답고 선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맛볼 수 있으니, 무엇보다 복된 것이다.   우리는 조상에게 오늘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늘을 빌려 쓰고 있다. 그러므로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오늘 맛본다. 하늘의 청지기는 근엄한 창고지기가 아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빛나게 하는 빛이고 소금이며 세상을 참으로 즐거워할 줄 알고 아름답게 만드는 이들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하나님 나라 우리 자손들 권능과 영광

2023-08-07

[등불 아래서] 열매는 가지에 달린다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 가지에 비유하셨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가지의 일은 열매를 맺자가 아니라 나무에 붙어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열매만 맺자고 애쓰는 가지도 안쓰럽지만, 한편 나무에 붙어 있으려고 바둥바둥 애쓰는 가지도 만만치 않다. 마치 체력 측정장에서 가쁜 숨을 쉬며 떨리는 팔로 철봉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인상을 쓰는 학생들처럼 말이다.   비유에는 나무에 붙어있는 우리의 모습이 나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붙어 있는 모습은 아니다.   특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라는 말씀은 고난도의 묘기를 보여주는 철봉 선수에게 "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봐라. 내가 붙잡아 줄 테니 아무 염려 말고"라는 코치의 소리로 들린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던 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꼭 붙잡고 있어. 떨어지면 끝장이야"가 아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안에 거하라는 끝이 아니다. 기쁨으로 거하라.   우리는 즐거운 인생과 행복을 원하면서도 그런 인생은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사는 듯하다. 여기에는 세상을 좋아해서는 안 되고, 항상 거룩하고 근엄한 경건에 좀 더 점수를 주는 경향도 한몫할 것이다. 거룩과 경건은 신앙생활에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즐거운 거룩' '미소가 절로 생기는 경건' '미치도록 기쁜 인내' '마음이 붕 뜨는 봉사'는 어떤가.   물론 버티는 것도 실력이다. 자리를 지키는 것도 성실이다. 내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성품이다. 그렇다면 즐겁게 버티고, 웃으며 자리를 지키고, 기쁘게 책임을 다하는 것은 더 멋있지 않은가.   C. S.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의 문제는 행복을 너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기쁨을 준다고 해도 겨우 삶의 쾌락과 성공 등에만 집착하면서 너무 쉽게 만족해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 안에 거하는 일은 기쁨으로 가득 차는 일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서 나무의 모든 명성과 영광을 누린다. 루비로망은 그 가지도 루비로망이다. 그뿐인가. 열매는 가지에 달린다. 나무가 다해 주고 열매를 가지에 맺게 하신다. 이 얼마나 황홀한 기쁨인가. 이 기쁨을 누릴 때까지 기쁨을 멈출 수 없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열매 너희 기쁨 철봉 선수 쾌락과 성공

2023-07-10

[등불 아래서] 마음도 주소가 있다

경제 지표들이 춤을 추는 세상이다. 내 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 역시 비유를 들어 같은 질문을 하셨다. 너의 보물을 어디에 두겠느냐. 어디도 중요했지만, 마음이 결론이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의 주소와 마음의 주소가 같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말한 보물의 주소는 땅이 아닌 하늘이다. 놓치지 말자. 보물은 같다. 그런데 주소가 다르다.     소중한 것은 같다. 재물, 생명, 부모, 자녀, 친구, 나 자신 그리고 신앙 모두가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인생 전체가 소중하다. 소중한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보물의 안전과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땅에 이들을 담는다면, 땅의 가치를 넘을 수 없다. 우리의 최선은 우리의 능력이다. 혹은 운이라고 말하는 운명이다. 고통과 슬픔, 고뇌 그리고 죽음을 넘을 수 없다. 우리의 마음도 이곳에 주차했기에 열심히 사는 것, 지금을 즐기는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모르니 '현재를 잡아라'가 최선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앙을 땅에 주차하는 경우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최선이 자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의지하기에 하나님은 항상 보충 수업처럼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 제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라고 계속 구하지만, 실은 내 마음이 어디에 붙잡혀 있는지 묻지 않는다.   작고한 팀 켈러 목사의 말처럼 내 마음이 내 행복과 안락을 구하고 있다면, 내 삶을 힘들게 하는 이에게 분노를 느낄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라면 내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사람에게 분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람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를 붙잡고 있는 행복과 안락, 인정과 성취, 자존심이 그의 구주이고 그리스도인 것이다.   구원을 얻을 때는 예수님을 붙잡고, 그 다음에는 다시 자신을 붙잡는 일은 많은 결심과 결단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신앙을 땅에 다시 주차하는 일이다. 하늘은 우리의 마지막 결산이 땅에 있지 않다고 알려준다. 결산하는 것도 우리가 아니다.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정말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늘에 보물을 담는 이들은 미래를 알기에 현재를 즐거워한다. 우리의 마음은 영원에 주차한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주차하고 있는가.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마음 주소 성취 자존심 안전과 가치 안락 인정

2023-06-12

[등불 아래서] 은혜의 단비

5월에 비가 내린다. 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남가주에서 비를 마중하는 일은 생소한 일이다. 밖에 내다 놓은 화분 속 꽃들이 춤추고, 막 피어나는 감꽃이 비를 피해 고개를 숙인다. 마지막 꽃을 피우던 동백은 힘을 내어 하늘을 향하고, 신이 난 선인장들도 꽃봉오리를 세운다.     우산 좀 쓰라는 잔소리를 듣겠지만, 너무나 드문 이 봄의 여흥을 함께하고 싶어 성큼 빗속으로 걸어 들었다. 싸늘하게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인데 왠지 따뜻하다. 예상하지 못한 여름 속 봄비는 뜨거운 태양 속에 숨이 막히도록 톺아 올라가야 했던 풀들에 생기가 돌게 했다.   구름은 잠시 해를 가려주고, 비를 맞으며 꽃들도 풀들도 숨을 돌린다. 비는 그래서 물이 아니다. 물이 떨어지지 않고 비가 내린다. 어떤 농부도 다 돌볼 수 없는 잎자락 하나까지 비는 어루만지고, 필요한 구석구석까지 땅속으로, 잎 속으로 스며든다.     안개비는 촉촉하게 가랑비는 가늘게 장대비는 굵고 장하게 모두를 두드리고, 적시고 흘러내린다. 심지어 먼지만 적시는 먼지잼도 있다. 갑자기 지나가는 소나기는 더위를 식히고, 비를 기다리는 농부에게는 약비가 되어 내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비가 있다. 단비는 달콤한 비가 아니라 꼭 필요할 때 알맞게 내리는 비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래서 단비이다. 가뭄 속 단비는 약비이고, 뜨거워 숨 막힐 때 단비는 소나기이며, 두려움 속 단비는 꿀비이고, 유혹 속에 흔들릴 때 단비는 모다깃비, 바로 뭇매를 치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이다. 단비는 하나님의 시간을 우리 시간 속에 내려 준다.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덮으며 내려주신다.   선한 일을 행하다 낙심될 때마다, 우리의 논밭은 갈라진다. 불의한 세상에 깊은 상처를 입을 때마다, 곡식들은 쓰러지고 병이 든다. 내 필요 없는 고집과 욕심에 속이 썩어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말라간다. 하나님의 단비를 구해야 하는 시간이다.   죄와 싸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선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죄를 죽이려 한다면 죄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루터가 말했듯이 주님은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되셨고, 박해자요 신성 모독자요 잔인했던 바울이 되셨고, 간통자인 다윗이 되셨다. 그리고 죄인의 부활과 생명이 되셨다. 신자는 이 은혜의 비를 맞아야 사는 사람이다. 단비는 땅만 적시지 않는다. 알맞을 때 내리는 비는 다가올 햇살을 준비한다. 은혜는 벅찬 생명이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은혜 단비 우리 시간 신성 모독자 고집과 욕심

2023-05-08

[등불 아래서] 인간에게 가장 힘든 말

요즈음 LA는 봄으로 물든 청록의 땅과 겨울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눈 덮인 산으로 마치 엽서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이에게 오는 경탄이다.   불안도 있다. 선물 안에 이상 기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년간 폭염이 계속되고 극한 가뭄이 오더니 38년 만에 눈보라를 맞이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근 100년간 지구 온도는 섭씨 1도 정도 올랐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난 1만 년에 걸쳐 올라간 기온이 겨우 섭씨 4도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진보해 왔다. 수많은 발견과 발명, 도전과 성취가 있었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는 진보는, 안타깝지만, 우리의 마음에도 일어났다. 욕심은 항상 더 많은 욕심을 낳았다. 과학이 진화할수록 욕심은 더 빨리 진화했다.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이도록 화학비료를 만든 혁명이 일어났지만, 더 많은 수확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 마구 뿌려진 비료는 땅을 지나 강과 바다까지 오염시켰다.   바다는 어떤 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떤 물도 마다하지 않던 바다도 우리의 욕심에는 멍이 들었다. 어찌 바다뿐이랴. 우리의 욕망으로 만물이 신음한다. 협약과 협정도 필요하지만, 욕망이 멈추지 않으면, 바다도 만물도 결국 무너질 것이다.     그럼 욕심을 버리면 된다. 이 간단한 말이 인간에게는 가장 힘들고 먼 말이다. 욕심을 버리려고 또 다른 욕심을 부리는 것이 우리니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죄와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버리고 욕심을 내려놓은 당신이라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로 오라고 하신다. 온 우주조차도 쓰레기장으로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욕심을 진 채로 오라고 하신다. 우리의 죄와 욕심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이요,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 나를 대신하시는 것이다. 믿음조차도 하나님을 대신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죄조차도 주님께 나아간다면 주님은 자신의 심장에 우리가 박아댄 셀 수 없는 못보다 우리에게 있는 가시 하나에 더 아파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깨닫게 해서 욕심을 버리게 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욕심이 되어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다. 아름다운 눈과 싱싱한 청록으로 덮인 남가주의 소망은 욕심을 버린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죄와 욕심을 위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협약과 협정도 수년간 폭염 지구 온도

2023-03-20

[등불 아래서] 힘들더라도 걸어야 하는 이유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에게 돈은 많지만 바빠서 잘 놀아주기 힘든 부모와 가난하지만 가정적인 부모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하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취지일 것이다. 이런 질문은 사실 오랫동안 우리 주위에 있었고 아마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일 것이다. 어른들이 자신의 눈높이에서 만든, 그래서 아이를 혼란에 빠뜨리는 질문들이다.   한 아이가 ‘꼭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면’이라고 토를 달고서는 부유한 부모를 택했다. 이유는 가난해서는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부자인 부모가 할 수 있는 일로 ‘여행’을 들었다. 가난하면 마음대로 여행을 못 가고 결국 좋은 추억도 만들 수 없다는 나름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질문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을 더 혼란에 빠뜨렸다는 점이다. 영상에 달린 댓글은 ‘슬프다. 벌써 아이들이 저렇게 생각한다니’부터 ‘애들이 더 현실적이다’ ‘돈 없는 부모는 답도 없다’는 식의 글이 줄을 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제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들어선 한국에서 가난이 더욱 무서운 단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남들과 같은 여유와 부를 가지지 못하면 모두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파른 성장 속에 부를 성공으로 생각하며 살아 온 사람들은 더 이상 돈으로 행복을 사지 못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도 돈’이라는 체험이 오히려 진리에 가까운 것이다.   안타깝지만 성장과 성공은 교회 역시 피해 가지 않았다. 성장과 성공이 가난과 그로 인한 많은 불행을 밀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공 뒤에 있는 욕망을 무시한 대가는 간단하지 않았다. 영혼을 향한 사랑은 교회 확장 속에 파묻히고, 성공한 목사, 대형교회, 그리고 교세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제일 무서운 사실은 교회가 잘못을 알게 되어도 성공이 무너질까 봐 회개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명목 때문에 교회는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는다. 하나님은 괜찮으신데 우리가 더 난리다.   어리석은 질문을 한 어른들에게 말한다. 부자와 가난이 아니라 부모가 소중하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교회는 말해야 한다. 성공과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중하고 성도가 귀하다. 물이 급히 흘러도 물에 비친 달은 떠내려가지 않는다. 바르다는 것은 우리가 힘들더라도 걸어가야 하는 충분한 이유다.   [email protected]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목사 대형교회 교회 확장 선진국 대열

202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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