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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아래서] 세상이 그려놓은 선

학교를 다녀와서 다시 학원을 가지 않아도 되던 시절, 방과 후 골목길은 여름 한날의 더위도 식혀주던 놀이터였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오징어를 하자, 아니 사방 치기를 하자고 엄지를 추켜세우며, 여기 붙으라고 소리치는 합창 소리가 쟁쟁했습니다.   조금 밥그릇 수를 더 쌓았다고 고학년들은 무기를 챙겨서 나옵니다. 구슬과 딱지로 무장하고는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나름 살벌한(?) 각오를 다지며 골목길에 등장합니다. 삼각형을 그리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호주머니에서 구슬들을 꺼내 놓습니다. 딴에는 오케이 목장의 결투보다 진지합니다. 엄지 구슬로 선후를 정하면 비장한 삼각형이 시작됩니다. 쪼아 찍기, 깔 패기, 날라 찍기. 이름도 화려한 초식들이 등장하고 탄식과 한숨 그리고 웃음소리가 골목을 점령해 갑니다.   오늘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눈에 힘을 주며 구슬을 노려보지만, 상대방은 염소가 날름날름 종이를 집어먹듯이 구슬을 따갑니다. 그때마다 소년의 눈빛은 점점 내려앉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릅니다. 그때 갑자기 큰 환호와 탄식소리가 터졌습니다. 잘나가던 상대의 엄지 구슬이 삼각형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입니다. 이제껏 먹은 모든 구슬을 토해내야 하니 그 억울함과 통쾌함에 골목이 떠들썩해집니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인생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려놓은 삼각형 밖으로 밀려나면 구슬은 죽습니다. 땅에 그린 선이 무슨 힘이라도 있는지, 사방 치기도 오재미도 그렇습니다. 선을 밟아도 죽고, 선 밖으로 나가도 죽습니다.   세상이 그려놓은 선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뒤처지는 것이고, 좌절이며 인생의 실패라고 부릅니다. 여전히 땅 위에 있지만, 구슬은 더는 놀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지만, 내일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죽어버린 구슬들은 그렇게 내일을 잃었습니다. 그때 엄지 구슬이 삼각형 안으로 선을 넘어들어왔습니다. 엄지 구슬은 죽었고 다른 구슬들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우리들의 소원이 그랬나 봅니다. 아무것도 아닌 듯한 아이들의 삼각형에도, 오징어 놀이에도, 술래잡기도 다방구에도 살펴보면 회생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집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향해 돌아서듯 다시 사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일도, 착한 일도 나를 지으신 이가 없다면 어찌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모두 받았지만 자기가 한 듯이 자기 것처럼 살아가니 이것이 바로 자신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선 밖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죽기 위해 선 안으로 들어온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나는 그래도 더 예쁜 구슬이어서 살았다고 스스로 속지 않도록, 하나님 자신이 선을 넘어와 죽으셨습니다. 남보다 나은 깨달음도, 앞서는 능력을 가진 나도 아닌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믿음입니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엄지 구슬로 구슬과 딱지로 오징어 놀이

2024-04-01

[등불 아래서] 너는 행복자로다

남가주 지역의 산들이 눈으로 덮였다.     차가운 빗줄기를 뚫고 목련은 꽃을 피웠다. 올해도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한다. 그래도 봄은 소매를 붙잡는 겨울을 뿌리치고 오지 않는다. 봄은 겨울의 손을 잡고 온다. 단단해진 땅도 앙상해진 가지들도 모두 잡고 온다. 차가운 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고통과 함께 황홀한 봄은 온다. 봄은 행복하다.   지치고 메마른 앙상한 가지를 품었기에 봄은 행복하다. 그리고 여기 아픈 가시가 돋아나 자신마저도 찌르는 우리를 뿌리치지 않고 가슴에 안아 따스한 싹을 틔운 우리의 봄이 있다. 이 봄은 아픈 우리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봄이다. 행복한 봄, 행복한 사람, 예수님이다.   윤동주의 시처럼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다.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이고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이 행복한 아들로 아버지는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가시가 돋아난 우리를 안으셨기에 행복하시다. 성령님은 앙상한 우리를 위해 지금도 말할 수 없이 탄식하시기에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밖에 모르는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으시고, 바늘도 꽂히지 않는 단단한 내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기에 괴롭지만 행복한 하나님이시다.   겨울을 뿌리치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홀로 영광과 존귀를 모두 받으시며 행복하실 분이지만, 십자가 위에서 영광이 아니라 우리의 수치를 품으셨다. 존귀가 아니라 우리의 불의를 품으셨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의를, 그의 모든 지혜를,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그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행복을 가졌으니 말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하기에 아프고,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하기에 힘들다. 무례하지 않아야 하기에 고통이고, 시간의 터널을 버텨야 하기에 고독하다. 무시당하기도 하기에 억울하다.     그래도 우리는 겨울을 뿌리치지 않는다. 아파하는 가시들을 예수님과 함께 품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 지르는 추운 가지들을 싸맨다. 끝나지 않는 것 같고, 세상이 이길 것 같다. 불의는 배부르고, 거짓은 칭송을 받는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이 행복하셨던 그 길을 간다. 자신에게 말해 본다. 그래, 행복하게 가자.   우리 안에 행복한 하나님이 계신다. 홀로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를 품으셔서 행복한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주의 구원을 너와 같이 얻은 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이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로다 (신 33:29)."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행복자 남가주 지역 주의 구원 자기 목숨

2024-03-04

[등불 아래서] 왜 열심을 내는가

훈련이란 우리 자신을 갈고 닦는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절차탁마 즉 자르고 쓸고 쪼고 간다고 말했다. 위나라를 번창시켰던 무공이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자신을 수양하고 경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모습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은 돌을 제련하여 결국 금을 만드는 과정과도 같아서 자주 고통과 고난을 동반하기에 연단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렇듯 갈고 닦아서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 내려고 할까.   요즘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 자아가 중요한 때가 되었다. 그래서 자기 계발이 넘쳐나고 이를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여론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에서 '무엇이 당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17개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를 했다. 여기에는 한국도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은 압도적으로 '가족'을 꼽았다.     한국은 달랐다. '경제적 부'가 최우선에 올랐다. 한국 사람들이 자기 계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쏟는 진짜 목적이 물질적 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절차탁마이든 대기만성이든, 과정만큼이나 그 목적지도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열심히 절차탁마해서 도착할 곳이 의외의 장소일 수 있다는 말이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훈련하고 연단하라고 말한다. 신자들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선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심지어 이것도 경쟁하듯이 남보다 앞서려고 애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토록 훈련하는가.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연단이고 훈련인가. 자기 수양은 훌륭한 일이지만, 더 나아진 내가 모든 것이라면, 결국 모든 영광은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내가 목표라면 내가 빛날 것이다.   하나님의 훈련은 나를 다듬어서 빛나게 하는 절차탁마가 아니다. 오히려 나를 빛나게 다듬으시는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광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인정받고, 빛내려고, 남보다 나은 내가 되려고 자신을 닦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라면 이미 영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형상을 다시 얻으려는 내가 아니라, 누리고 즐거워할 나인 것이다.   하나님의 훈련은 우리를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고 그분을 의지하게 한다. 내가 나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열심 모두 하나님 여론조사 기관 사도 바울

2024-02-05

[등불 아래서] 설레는 사랑 오늘부터

새해 첫날에는 떡국을 먹는다. 긴 가래떡을 엽전 모양으로 자른 떡 위에 색색으로 얌전히 고명을 얹는다. 오방색을 띤 고명은 식욕을 돋우려고 음식 위에 얹는 것인데 이를 달리는 교태(交胎)라고도 불렀다. 처음 벗하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이 음식은 누구도 손대지 않은 새것이라는 말이고, 이제 벗을 만나듯 사귀라는 뜻이니 가히 대단한 운치가 아닐 수 없다.     고명이 음식을 새롭게 만난다면 새로운 해를 만나는 것은 설이다. 예전에 설이라면 음력 새해 첫날이었지만 이제는 양력설도 챙긴다. 설은 시작하는 날을 말하지만, 어떤 학자는 ‘낯설다’의 어근인 설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설은 시작하는 새로운 날이고 낯선 시간에 발을 디디는 날이다.     낯선 벗을 만나 사귀기 시작하는 날. 새롭고 낯설기에 두렵고 불안하다. 새로운 것만 낯선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이 새겨놓은 무거운 짐들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섦으로 우리를 두렵게 한다. 아픔이란 아무리 만나도, 만날 때마다 낯설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낯선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이기도 하다. 우선 새로운 일, 새로운 사람이 주는 설렘이 있다. 또는 우리를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뜨게 하는 설렘도 있다. 그래도 우리를 가장 설레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토록 어둡고 무거운 시간,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곁에서 걸어주던 사랑. 갑자기 등불을 켜고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했던 사랑. ‘울어라. 마음껏울어라’ 하며 눈물을 받아주고 다음 날 햇살을 비춰주던 고요했던 그 사랑. 내가 그 선한 품에 안겨있는 것도 모르고 잘난 줄 알다 넘어질 때, 두려워 말라 너는 내 품에 있다고 놀라게 하셨던 그 사랑. 그 낯선 사랑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새해 첫날은 낯선 사랑을 기대하는 날이다. 낯선 사랑과 사귀기 시작하는 날이다. 익숙해지지 않는 그래서 우리를 항상 놀라게 하시는 선하신 주님으로 설레는 날이다.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어두운 짐조차도 친구로 만드시는 그 사랑을 만난다. 익숙해지지 않는 놀라움으로 항상 설레게 하는 사랑을 만난다.   그래서 오늘이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렘도 없고 색깔도 없는 고명이 아니라, 국 속에 섞여서도 맛을 내고 향을 뿜어내며 아름답게 모양을 내어 여전히 낯설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주님의 날이기를 바란다. 어둡고 무거운 짐조차도 누르지 못하는 주님으로 놀라고 설레는, 올 한해 내내 우리를 붙잡고 가실 사랑, 그 사랑과 사귀는 시작이 오늘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사랑 사랑 오늘 음력 새해 엽전 모양

2024-01-01

[등불 아래서] 우리의 뒷배, 하나님

세상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실력이다. 돈이나 학벌이나 외모만이 아니다. 감동이 있다면 내 인생 이야기까지도 실력이 되는 시대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이 실력이다.   그래서인지 살면서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은 서럽다"라는 말이었다. 이 말이 속으로 얼마나 한이 되었는지 교회에서도 "하나님이 너의 빽이다. 기죽지 마라"는 말을 꽤 들었다.   실지로 온 우주를 지으신 찐 부자 하나님께서 내 뒷배라는 사실에 힘을 얻기도 했다. 무엇이 걱정인가. 우주 최고의 부자가 내 아버지이신데. 그래서 이 부자 아버지가 인색하게 구시는 날이면 분노했다. 그렇게 세상 돈 다 가지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 왜 나한테는 이러시냐고 눈을 치떴다. 그래도 하나님은 무서워서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기는 했지만 말이다.   뒷배란 겉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보살펴 주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의 뒤에서 나를 보살펴주는 하나님. 그런데 만일 당신이 이런 뒷배 하나님을 만났다면, 애석하지만 지나치시라. 그는 하나님이 아니다. 당신이 하는 일을 무조건 응원해 주고, 묵묵히 바라봐주는 키다리 아저씨처럼 아름다운 뒷배라도 하나님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는 뒷배 하나님은 실은 이름만 바꾼 당신의 욕심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욕심과 싸우실 터이니 뒷배가 아니시고, 당신이 원하는 것이 진리라면 함께 가실 터이니 뒷배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이유는 우리를 뒤에서 묵묵히 도와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의미 있게 만드시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시고, 우리의 인생이 되신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신다. 그래서 주님이시다.     세상은 하나님을 뒷배로 삼으라고 계속 가스라이팅을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없는 것이 실력이다. 돈이 없어서 실력이고 학벌이 없어서 실력이다. 내 인생이 밋밋해서 실력이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만드는 모든 것이 실력이다.   오해하지 마시기를. 좋은 학교, 소중한 경력,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버는 돈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이 단어들 앞에는 "자랑할"이란 말이 붙는다. 자랑할 돈이 없는 것이 실력이고, 앞세울 학벌이 없는 것이 실력이다. 하나님만이 내 자랑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내 빽이 아니라, 내 전부이시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목사 / 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하나님 부자 하나님 인생 이야기 부자 아버지

2023-12-04

[등불 아래서] 먼지 한 톨도 무겁지만

예전에 아침 등굣길은 버스에 올라타려고 뛰어가는 순간부터 숨 막히는 전쟁이었다. 더는 도저히 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이들은 버스 안으로 빨려 올라가고 문을 닫지도 못한 안내양들은 마지막 잎새처럼 난간에 매달려 숨 고르기를 했다. 운전기사의 전설적인 S자 운전을 기다리는 것이다.   한쪽으로 사람들을 기막히게 몰아버리는 순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두를 밀어 넣으며 문을 닫는 기술은 아침부터 비명과 함께 경탄을 자아냈다. 흰 장갑을 끼고 숨을 몰아쉬던 누이들은 지금 생각해 보니 겨우 서너 살 더 많았던 정말 삶을 치열하게 살던 전사들이었다.   피곤함에 지쳐 한 정거장에서 쪽잠을 청하다가, 조금 늦게 문을 열었다고 막무가내 승객이 퍼붓던 한 사발 욕을 다 먹기도 했다. 그렇게 꿋꿋해 보이던 그녀는 한 승객이 "그러니 왜 잠을 자. 서울까지 뭣 하러 와서는"이라는 말에 돌아보지도 못하고 조용히 서럽게 울었다.     설상가상. 눈 위에 서리가 내린다는 이 말은 원래 더해 봤자 표도 안 나는 잔소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가벼운 서리가 무거워졌다. 엎친 데 덮친다는 뜻이 되었으니 말이다. 정말 힘들 때는 먼지 한 톨도 무거운 법이다.   우리도 모두 인생의 무게를 지고 걷는다. 한마디 말이 먼지 같지만, 그 먼지로 무너지기도 한다. 그 말이 연자 맷돌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문가에 서서 서럽게 울던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금세 눈을 훔치고는 '오라이'하며 씩씩하게 버스 옆구리를 치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얼굴을 고치려고 꺼냈던 조그만 손거울. 그리고 그 뒤에 붙어있던 가족사진.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작은 손거울 뒤에 붙은 가족사진이 힘차게 '오라이'를 외치게 했다면, 우리 인생을 홀로 두지 않고 그 어깨에 우리를 짊어지는 분이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외칠 수 있을까? 내 인생을 짊어진 그 분이 눈 위에 다시 내린 서리를 어찌 짊어지지 못하겠는가? 나의 상처를 자기 심장에 새긴 분이 어찌 먼지 한 톨을 함께 새기지 못하겠는가.   내 인생의 거울. 그 거울 속에는 내 얼굴만 있지 않다. 예수님의 얼굴이 있다. 먼지 한 톨도 무겁고, 상처 하나도 아프지만 주님은 넉넉하게 우리 인생을 모두 짊어지신다. 주님이 나의 발자국이 되어 주시는 인생이라면 우리도 힘차게 '오라이(all right)'라고 외치자. "주님, 모두 괜찮고 모두 좋습니다. 앞으로 가세요. 함께 가겠습니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목사 / 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먼지 우리 인생 모두 인생 버스 옆구리

2023-11-06

[등불 아래서] 나보다 아래는 없다

어릴 적 부모님들의 관심은 성적이었다.     전쟁과 가난으로 공부에 한이 맺히신 분들도 많았고, 자식의 성공으로 자신을 찾으려는 분들도 있었다. 아이도 덩달아 공부를 잘하는 것이 벼슬이었다. 자라 보니 세상은 더 조건을 찾았다. 결국, 나를 인정받고 빛내기 위해 더 많은 조건이 필요해졌다. 좋은 스펙을 쌓는 일이 왜 나쁘겠는가. 안타까운 것은 나와 내 조건이 한 인격을 세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스펙이 인간에 앞섰다.   애석하게도 신앙도 그런 조건처럼 되지 않았나 싶다.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세상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조차도 필요하면 쓸 수 있는 나를 위한 '아빠 찬스'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가진 여러 조건 중 하나가 아니다. 내 인생을 위한 뒷배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심지어 성숙시키기 위한 능력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꿀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환경이나 선물 혹은 행복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만족이시며 우리 인생의 의미가 되시고 내 기쁨이며 나의 행복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우리의 만족이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한 시인은 기도하고 노래했다.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   신학자 본 회퍼는 유혹의 본질을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우리와 피조물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으로 보았다. 반짝이는 금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하면, 별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기쁨을 위한 들러리일 뿐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신앙은 나를 빛내려는 장식물이 되었다. '믿음이 좋은 나, 기도 잘하는 나, 잘되는 나, 성경을 많이 아는 나'가 되었다. 겉으로 그럴 듯 빛나 보이지만 하나님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자기 성취가 아니라 자기 부인이 아니었던가. 내가 만든 사과나, 가게에서 사 온 배를 달아 놓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화려한 이력들을 더덕더덕 더 붙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 이력과 신념, 자랑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이웃을 나보다 높게 여기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말 그대로 우리는 죄인 중의 괴수다. 나보다 아래는 없다. 이 겸손이 자기를 낮추사 제자들의 발을 만지며 씻으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마음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통계가 아니다. 업적도 능력도 아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며 정의를 행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당신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오늘날 신앙 업적도 능력 아빠 찬스

2023-10-02

[등불 아래서] 빌려쓰는 오늘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지구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손으로부터 지구를 빌려 쓰는 것이다."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이 말은 1971년 웬델 베리가 최초로 쓴 표현이 변화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우리 것이 아니라 우리 자손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말이니 틀림없는 사실이고, 잊지 말아야 할 생각이다. 우리의 계획이 아무리 멋져 보여도 미래 우리 자손들을 생각하며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래서 어떤 이는 "빌려 쓰는 것인데 갚을 능력이 없다면 이는 도둑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과연 우리에게 갚을 능력이 있을까. 오용하고 파괴할 능력은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회복하고 복구할 능력이 우리에게 정말 있을까. 근본적으로 묻는다면 지구가 본래 우리와 우리 자손 것이었는가.   돌이켜 보면 우리 것으로 생각하는 여기서 문제는 시작되었다. 우리가 겪는 '우리의 위기'를 '지구의 위기'라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 마음 밑바닥에는 지구의 주인이 당연히 우리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지구는 아쉬울 것이 없다.   출발선을 다시 그어보자.   "주님이시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님께 속하였으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님의 것이로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또는 우리 자손의 것을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쓰고 있다. 그러니 지구를 고치려면 하나님을 생각하며 계획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청지기다. 그런데 이 말은 자주 하나님 것이니 조심 또 조심하며, 항상 주인 눈치를 봐야 한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다.   우리가 빌려서 쓰는 것이 어떤 나라인가. 우리가 망치고 파괴할 세상이 아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세상이고 하나님의 나라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오늘 구하고, 오늘 즐기며, 오늘 누린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왜 먹고 마시는 것에 앞서는가. 먹는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비장한 군사가 되는 것이 다는 아니다. 의롭고 아름답고 선한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맛볼 수 있으니, 무엇보다 복된 것이다.   우리는 조상에게 오늘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늘을 빌려 쓰고 있다. 그러므로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오늘 맛본다. 하늘의 청지기는 근엄한 창고지기가 아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빛나게 하는 빛이고 소금이며 세상을 참으로 즐거워할 줄 알고 아름답게 만드는 이들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하나님 나라 우리 자손들 권능과 영광

2023-08-07

[등불 아래서] 열매는 가지에 달린다

나는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그 가지에 비유하셨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가지의 일은 열매를 맺자가 아니라 나무에 붙어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열매만 맺자고 애쓰는 가지도 안쓰럽지만, 한편 나무에 붙어 있으려고 바둥바둥 애쓰는 가지도 만만치 않다. 마치 체력 측정장에서 가쁜 숨을 쉬며 떨리는 팔로 철봉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인상을 쓰는 학생들처럼 말이다.   비유에는 나무에 붙어있는 우리의 모습이 나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붙어 있는 모습은 아니다.   특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라는 말씀은 고난도의 묘기를 보여주는 철봉 선수에게 "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봐라. 내가 붙잡아 줄 테니 아무 염려 말고"라는 코치의 소리로 들린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던 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꼭 붙잡고 있어. 떨어지면 끝장이야"가 아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안에 거하라는 끝이 아니다. 기쁨으로 거하라.   우리는 즐거운 인생과 행복을 원하면서도 그런 인생은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사는 듯하다. 여기에는 세상을 좋아해서는 안 되고, 항상 거룩하고 근엄한 경건에 좀 더 점수를 주는 경향도 한몫할 것이다. 거룩과 경건은 신앙생활에서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즐거운 거룩' '미소가 절로 생기는 경건' '미치도록 기쁜 인내' '마음이 붕 뜨는 봉사'는 어떤가.   물론 버티는 것도 실력이다. 자리를 지키는 것도 성실이다. 내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성품이다. 그렇다면 즐겁게 버티고, 웃으며 자리를 지키고, 기쁘게 책임을 다하는 것은 더 멋있지 않은가.   C. S.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의 문제는 행복을 너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기쁨을 준다고 해도 겨우 삶의 쾌락과 성공 등에만 집착하면서 너무 쉽게 만족해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님 안에 거하는 일은 기쁨으로 가득 차는 일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서 나무의 모든 명성과 영광을 누린다. 루비로망은 그 가지도 루비로망이다. 그뿐인가. 열매는 가지에 달린다. 나무가 다해 주고 열매를 가지에 맺게 하신다. 이 얼마나 황홀한 기쁨인가. 이 기쁨을 누릴 때까지 기쁨을 멈출 수 없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열매 너희 기쁨 철봉 선수 쾌락과 성공

2023-07-10

[등불 아래서] 마음도 주소가 있다

경제 지표들이 춤을 추는 세상이다. 내 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 역시 비유를 들어 같은 질문을 하셨다. 너의 보물을 어디에 두겠느냐. 어디도 중요했지만, 마음이 결론이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의 주소와 마음의 주소가 같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말한 보물의 주소는 땅이 아닌 하늘이다. 놓치지 말자. 보물은 같다. 그런데 주소가 다르다.     소중한 것은 같다. 재물, 생명, 부모, 자녀, 친구, 나 자신 그리고 신앙 모두가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인생 전체가 소중하다. 소중한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보물의 안전과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땅에 이들을 담는다면, 땅의 가치를 넘을 수 없다. 우리의 최선은 우리의 능력이다. 혹은 운이라고 말하는 운명이다. 고통과 슬픔, 고뇌 그리고 죽음을 넘을 수 없다. 우리의 마음도 이곳에 주차했기에 열심히 사는 것, 지금을 즐기는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미래를 모르니 '현재를 잡아라'가 최선이다.   안타까운 것은 신앙을 땅에 주차하는 경우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신의 최선이 자신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의지하기에 하나님은 항상 보충 수업처럼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 제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라고 계속 구하지만, 실은 내 마음이 어디에 붙잡혀 있는지 묻지 않는다.   작고한 팀 켈러 목사의 말처럼 내 마음이 내 행복과 안락을 구하고 있다면, 내 삶을 힘들게 하는 이에게 분노를 느낄 것이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라면 내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사람에게 분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람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를 붙잡고 있는 행복과 안락, 인정과 성취, 자존심이 그의 구주이고 그리스도인 것이다.   구원을 얻을 때는 예수님을 붙잡고, 그 다음에는 다시 자신을 붙잡는 일은 많은 결심과 결단을 만들어 낼 수는 있으나, 신앙을 땅에 다시 주차하는 일이다. 하늘은 우리의 마지막 결산이 땅에 있지 않다고 알려준다. 결산하는 것도 우리가 아니다.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지 정말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늘에 보물을 담는 이들은 미래를 알기에 현재를 즐거워한다. 우리의 마음은 영원에 주차한 것이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주차하고 있는가.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마음 주소 성취 자존심 안전과 가치 안락 인정

2023-06-12

[등불 아래서] 은혜의 단비

5월에 비가 내린다. 여름의 문턱에 들어선 남가주에서 비를 마중하는 일은 생소한 일이다. 밖에 내다 놓은 화분 속 꽃들이 춤추고, 막 피어나는 감꽃이 비를 피해 고개를 숙인다. 마지막 꽃을 피우던 동백은 힘을 내어 하늘을 향하고, 신이 난 선인장들도 꽃봉오리를 세운다.     우산 좀 쓰라는 잔소리를 듣겠지만, 너무나 드문 이 봄의 여흥을 함께하고 싶어 성큼 빗속으로 걸어 들었다. 싸늘하게 얼굴에 떨어지는 빗방울인데 왠지 따뜻하다. 예상하지 못한 여름 속 봄비는 뜨거운 태양 속에 숨이 막히도록 톺아 올라가야 했던 풀들에 생기가 돌게 했다.   구름은 잠시 해를 가려주고, 비를 맞으며 꽃들도 풀들도 숨을 돌린다. 비는 그래서 물이 아니다. 물이 떨어지지 않고 비가 내린다. 어떤 농부도 다 돌볼 수 없는 잎자락 하나까지 비는 어루만지고, 필요한 구석구석까지 땅속으로, 잎 속으로 스며든다.     안개비는 촉촉하게 가랑비는 가늘게 장대비는 굵고 장하게 모두를 두드리고, 적시고 흘러내린다. 심지어 먼지만 적시는 먼지잼도 있다. 갑자기 지나가는 소나기는 더위를 식히고, 비를 기다리는 농부에게는 약비가 되어 내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비가 있다. 단비는 달콤한 비가 아니라 꼭 필요할 때 알맞게 내리는 비를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래서 단비이다. 가뭄 속 단비는 약비이고, 뜨거워 숨 막힐 때 단비는 소나기이며, 두려움 속 단비는 꿀비이고, 유혹 속에 흔들릴 때 단비는 모다깃비, 바로 뭇매를 치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이다. 단비는 하나님의 시간을 우리 시간 속에 내려 준다.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덮으며 내려주신다.   선한 일을 행하다 낙심될 때마다, 우리의 논밭은 갈라진다. 불의한 세상에 깊은 상처를 입을 때마다, 곡식들은 쓰러지고 병이 든다. 내 필요 없는 고집과 욕심에 속이 썩어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말라간다. 하나님의 단비를 구해야 하는 시간이다.   죄와 싸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선을 행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죄를 죽이려 한다면 죄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루터가 말했듯이 주님은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되셨고, 박해자요 신성 모독자요 잔인했던 바울이 되셨고, 간통자인 다윗이 되셨다. 그리고 죄인의 부활과 생명이 되셨다. 신자는 이 은혜의 비를 맞아야 사는 사람이다. 단비는 땅만 적시지 않는다. 알맞을 때 내리는 비는 다가올 햇살을 준비한다. 은혜는 벅찬 생명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은혜 단비 우리 시간 신성 모독자 고집과 욕심

2023-05-08

[등불 아래서] 인간에게 가장 힘든 말

요즈음 LA는 봄으로 물든 청록의 땅과 겨울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눈 덮인 산으로 마치 엽서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이에게 오는 경탄이다.   불안도 있다. 선물 안에 이상 기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년간 폭염이 계속되고 극한 가뭄이 오더니 38년 만에 눈보라를 맞이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근 100년간 지구 온도는 섭씨 1도 정도 올랐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난 1만 년에 걸쳐 올라간 기온이 겨우 섭씨 4도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는 진보해 왔다. 수많은 발견과 발명, 도전과 성취가 있었다. 그러나 뒤돌아보지 않는 진보는, 안타깝지만, 우리의 마음에도 일어났다. 욕심은 항상 더 많은 욕심을 낳았다. 과학이 진화할수록 욕심은 더 빨리 진화했다. 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이도록 화학비료를 만든 혁명이 일어났지만, 더 많은 수확을 돈으로 바꾸기 위해 마구 뿌려진 비료는 땅을 지나 강과 바다까지 오염시켰다.   바다는 어떤 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떤 물도 마다하지 않던 바다도 우리의 욕심에는 멍이 들었다. 어찌 바다뿐이랴. 우리의 욕망으로 만물이 신음한다. 협약과 협정도 필요하지만, 욕망이 멈추지 않으면, 바다도 만물도 결국 무너질 것이다.     그럼 욕심을 버리면 된다. 이 간단한 말이 인간에게는 가장 힘들고 먼 말이다. 욕심을 버리려고 또 다른 욕심을 부리는 것이 우리니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죄와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버리고 욕심을 내려놓은 당신이라서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로 오라고 하신다. 온 우주조차도 쓰레기장으로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욕심을 진 채로 오라고 하신다. 우리의 죄와 욕심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이요, 우리의 구원은 주님이 나를 대신하시는 것이다. 믿음조차도 하나님을 대신하려 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죄조차도 주님께 나아간다면 주님은 자신의 심장에 우리가 박아댄 셀 수 없는 못보다 우리에게 있는 가시 하나에 더 아파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깨닫게 해서 욕심을 버리게 하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욕심이 되어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다. 아름다운 눈과 싱싱한 청록으로 덮인 남가주의 소망은 욕심을 버린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죄와 욕심을 위해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협약과 협정도 수년간 폭염 지구 온도

2023-03-20

[등불 아래서] 힘들더라도 걸어야 하는 이유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에게 돈은 많지만 바빠서 잘 놀아주기 힘든 부모와 가난하지만 가정적인 부모 둘 중에 누구를 선택하겠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취지일 것이다. 이런 질문은 사실 오랫동안 우리 주위에 있었고 아마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일 것이다. 어른들이 자신의 눈높이에서 만든, 그래서 아이를 혼란에 빠뜨리는 질문들이다.   한 아이가 ‘꼭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면’이라고 토를 달고서는 부유한 부모를 택했다. 이유는 가난해서는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부자인 부모가 할 수 있는 일로 ‘여행’을 들었다. 가난하면 마음대로 여행을 못 가고 결국 좋은 추억도 만들 수 없다는 나름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질문이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을 더 혼란에 빠뜨렸다는 점이다. 영상에 달린 댓글은 ‘슬프다. 벌써 아이들이 저렇게 생각한다니’부터 ‘애들이 더 현실적이다’ ‘돈 없는 부모는 답도 없다’는 식의 글이 줄을 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제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들어선 한국에서 가난이 더욱 무서운 단어가 되었다는 점이다. 남들과 같은 여유와 부를 가지지 못하면 모두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가파른 성장 속에 부를 성공으로 생각하며 살아 온 사람들은 더 이상 돈으로 행복을 사지 못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도 돈’이라는 체험이 오히려 진리에 가까운 것이다.   안타깝지만 성장과 성공은 교회 역시 피해 가지 않았다. 성장과 성공이 가난과 그로 인한 많은 불행을 밀어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공 뒤에 있는 욕망을 무시한 대가는 간단하지 않았다. 영혼을 향한 사랑은 교회 확장 속에 파묻히고, 성공한 목사, 대형교회, 그리고 교세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제일 무서운 사실은 교회가 잘못을 알게 되어도 성공이 무너질까 봐 회개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를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명목 때문에 교회는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는다. 하나님은 괜찮으신데 우리가 더 난리다.   어리석은 질문을 한 어른들에게 말한다. 부자와 가난이 아니라 부모가 소중하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교회는 말해야 한다. 성공과 부흥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중하고 성도가 귀하다. 물이 급히 흘러도 물에 비친 달은 떠내려가지 않는다. 바르다는 것은 우리가 힘들더라도 걸어가야 하는 충분한 이유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목사 대형교회 교회 확장 선진국 대열

2022-08-08

[등불 아래서] 이상 유 (異狀 有)

 군대에서 잘 쓰는 말 중에 이상(異狀) 무(無)라는 말이 있다. 보고하거나 점호를 끝내면서 “이상 무”라고 외친다. 처음에는 보고할 것이 더 이상 없다는 뜻으로 알았다. 말 그대로 以上(이상)이었다. 선생님의 조례가 끝나면 항상 듣던 말이 아니던가!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도록. 이상”   그러나 “이상 무”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평소와 다른 것이 없다, 즉 “별 볼 일 없다”란 말이다. 조직 사회에서 사람들은 안전감을 느끼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평소와 다름이 없다” 위험이 없고, 편안한 생활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생활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 우리는 이런 꽃길(사전은 이 말의 뜻을 아름답고 화려한 길이 아니라 순탄하고 순조로운 길의 비유라고 적고 있다)을 마다하게 되는데, 이는 꽃길이 바른길 혹은 좁은 길을 만나는 때이다.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런 좁은 길이 나타났다. 당시 예배의 개혁을 원했던 스코틀랜드 교회에 국가가 정한 예배 형식을 강요한 일이 있었다. 1637년 7월 23일, 에든버러의 세인트 자일스 예배당에서 처음으로 이 형식에 따라 예배가 시작되자, 당시 노점상을 하던 제니 게데스 할머니가 의자를 사제에게 던지며 외쳤다. “거짓말하는 도둑놈” 그러자 다른 이들도 의자, 지팡이 심지어 성경책을 던졌다. 경건한 청교도들이 예배 시간에 말이다!     순탄한 길이 아니라 시민 혁명이라는 좁은 길, 고된 길로 들어서는 시작이었다. 현대의 눈으로 당시 영국 교회를 모두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은 성도인 자신이며 그 나라는 세상의 왕이 결정할 수 없다고 성도가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부른다. 어찌 “이상 무”가 쉽겠는가. 더구나 세속을 미워하지만, 이웃으로 세상을 사랑해야 하는 이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많은 경우 교회는 세상이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눈에 있는 들보부터 개혁해야만 한다. 꽃길이라는 익숙한 이름 아래 “이상 무”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꽃길은 이제 유효기간이 다했다면서 더 좋은 꽃길을 찾아 나서려고 해서도 안 된다. 뉴노멀로 또 들어서지 말고 좁은 길을 만나야 한다. 예배이건 열심이건 선교이건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관행에 익숙해진 꽃길은 바른길이 아니다.     이상이 있다고 말해달라! 그리스도의 몸이여, 교회답지 못한 모든 것에 저항하고 사랑으로 진리를 외쳐달라!     sunghan08@gmail.com 한성윤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예배이건 열심이건 스코틀랜드 교회 예배 형식

2022-07-04

[등불 아래서] 닳아버린 흔적이 있는가

오래전이지만 미국에 와서 가장 놀랐던 일 중 하나는 넓은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였고 그중에 같아 보이는 차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만든 차들이 경합을 벌이는 곳이니 당연했지만, 그때만 해도 거의 같은 모양에 색깔까지 비슷했던 차에 익숙했던 사람에게는 꽤 낯설고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놀란 일도 주차장에서 생겼다. 여전히 개성 만점의 차들이 빈틈없이 주차해 있었고 엉뚱하게 타이어가 눈에 들어왔는데 모든 타이어가 똑같은 검정이었다. 그렇게나 자신을 표현하기 좋아하는 시대에 빨강이나 노란 타이어가 없었다. 갑자기 낯설었고 그래서 놀랐다.   위에 얹혀가는 자동차는 모두 달라도, 길과 직접 부딪히는 타이어는 눈에 안 띄는 같은 색이다. 그렇게 보니 마치 세상이 다 변해도, 묵묵히 변하지 않고 험한 길과 싸워주는 반가운 사람을 만난 기분이었다.   개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알고 보니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검은색이다. 타이어는 고무로 되어있지만, 그 강도를 높이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탄소 가루인 ‘Carbon Black’과 합성해야 하고 그래서 검은색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잘난 화려한 세상 속에서 차와 그 안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길을 간 것이 아닌가.   그 평생이 닳아 없어지는 것을 봐도 그렇다. 사실 타이어는 옛날 수레바퀴처럼 나무 살과 바퀴를 링으로 묶어준다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이다. 영어로 하자면 ‘tie’ 죽 묶는다는 말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타이어의 험난한 일생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여러 일화를 만들어 냈다. 그중 많이 알려진 것이 자동차에서 가장 피곤한(tired) 곳이기에 타이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사실 엔진이 제일 피곤하긴 하지만, 험한 길과 매일 부닥치며 살아가니 꽤 그럴듯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런 험한 길과 끊임없이 갈등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래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타이어다. 아마도 그에게 남는 것은 닳아버린 상처 자국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엔진에 연결돼 있는 한 나아갔다. 마치 신자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고난 중에도 나아갈 수 있듯이 말이다. 비록 울더라도 나아간다. 예수님의 흔적이 남는 진리의 길이기 때문이다.   타이어를 보면서 참된 신자를 찾는 것이 안타깝지만 “믿는 자를 보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타이어는 닳아도 검은색이다. 고집스럽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신자가 그리운 것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흔적 사실 타이어 옛날 수레바퀴 carbon black

2022-05-09

[등불 아래서] 바른 것은 아름답다

 'orthodox'는 정통을 말한다.     옳다 혹은 바르다는 'ortho'와 견해를 의미하는 'doxa'의 합성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옳은 견해나 믿음을 뜻한다. 오늘날처럼 절대적 진리보다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보는 시대에서 정통이란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단어일 것이다.   과거에 정통은 경건 믿음 헌신과 함께 어울렸지만 지금은 독단 관습 권위 기득권 같은 말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옳은 길이라는 말이 틀린 길을 전제하고 있으니 정통은 태생이 좀 교만해 보인다. 생각해 보면 정통에 대한 거부감은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라는 말이나 태도가 큰 몫을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른 것만은 아니다. 옳고 틀린 길 역시 존재한다. 비록 어떤 분의 말처럼 그 길을 투표로 결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정의를 공동체가 만들어가든 개인에게 모두 맡기든지 옳은 길을 결정해야 한다.     신앙이란 옳은 길을 정해놓고 가자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옳은 길을 결정하는 내가 누구인가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다양하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두가 각자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정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이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정통일 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가 가진 확신이 아니라 질문이다. 내가 정통인가 내 견해는 완전하고 안전한가 그리고 우리는 어느 누구도 정통이 될 수 없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믿음은 내가 정통이라는 자랑이 아니라 나는 정통이 아니라고 겸손해지는 것이다. 참된 정통은 내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옳으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나를 부인한다. 내가 옳다고 여기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 믿음은 내가 정통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할수록 교만한 나를 알아가며 기도에 힘쓸수록 연약한 자신을 발견한다. 끊임없이 내가 '사이비'라는 사실을 알고 주님이 '정통'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라".   이때 바른 믿음은 아름다운 향기를 뿜는다. 치아를 바르게 하는 일은 치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내가 아니라 정통이신 예수님이 사신다. 누군가의 말처럼 비로소 우리는 신앙을 지니지 않은 어떤 사람들에게 그들이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이 되는 것이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정통이신 예수님 경건 믿음 예수 그리스도

2022-03-21

[등불 아래서] 슬퍼하지 말고 땅을 돌보라

 봄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무섭게 여름이 지척이다.     그래서인지 심심찮게 나무 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누구나 처음 심은 나무에게 사랑을 쏟는다. 물을 주고 비료를 준다. 잘 자라지 않는듯하면 비료를 더 넣고 물을 더 준다. 이 당연한 일이 당장은 도움 같으나 오히려 해가 될 때가 더 많다는 것을 키워본 사람들은 안다. 현명한 농부들은 나무를 사랑하는 길은 땅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장 나무만을 생각해서 땅에게 소홀하면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나무는 약해지고 아무리 좋은 비료를 넣어주고 물을 주어도 자라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침체했다고 느끼면 당연하게 자신을 개발하고 자신을 치료하려고 한다. 신자들도 더 열심을 부려 자신에게 투자한다. 말씀을 더 먹고 더 기도한다. 열심으로 교회 일에 힘을 쏟는다. 효과가 보인다. 성경 지식이 늘어나고 기도에 응답도 있고 봉사하면서 마음에 만족이 오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차가워지는 열심과 불만이 생기는 봉사 지쳐버리는 기도에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은 기도하는 나 성경 읽는 나 봉사하는 나에게 관심과 열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적들에 둘러싸여 힘들 때 곁에 있던 이들이 말했다. 당장 어떡하든 적의 화살부터 피하고 보라. 땅이 흔들리는 마당에 의로운 삶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그때 다윗은 말한다. 내 피난처가 하나님이신데 내가 어찌 다른 곳을 찾겠는가. 하나님은 의인을 찾으시는데 잠시를 위해 영원을 포기하겠는가.   요즘 우리는 수많은 적을 만난다. 코비드도 적이고 경제도 적이고 사회와 정치도 적투성이다. 언제나처럼 나 자신도 적이다. 코비드만 끝나면 돈이 주머니에 생기고 정치만 안정되면 가정이 편안하면 우리는 정말 괜찮을까. 아니 모든 것이 흔들리고 적이 강해 보일수록 우리가 뿌리박고 있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힘이며 안전이고 소망이라는 것에 우리의 모든 마음을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온 세상은 내 아버지의 세계라. 거짓과 악이 종종 너무 강해 보여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으로 다스리신다. 선한 싸움이 아직 우리 앞에 있으니 우리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과 하늘에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통일하실 것이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슬퍼하는가. 왕이신 주께서 다스리시니 하늘이여 기뻐하고 땅이여 즐거워하라. ('참 아름다워라' 중에서)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 당장 나무 성경 지식

2022-02-14

[등불 아래서] 새해에는 춤을 춥시다

새로운 해요 새로운 달이다. 새해에도 첫 해돋이를 맞으려는 인파로 그리피스 천문대가 붐볐다.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은 일상도 새해 첫 아침 소리를 듣고 깨어나기를 소원하는 우리들 마음일 것이다. 바다에 홀로 떠오르는 해도 장관이지만 어둠을 걷어내고 빌딩을 이겨내며 천지를 물들이는 도시의 일출도 못지않은 감동이다.   콘크리트 더미로만 보였던 도시는 안개 속에 빛으로 춤을 춘다. 새로운 시간이 흐른다.     밤새 세상을 감추며 펼쳐놓았던 검은 보자기는 주황빛 손이 되어 꼼지락거리는 빛에게 묶여버린다. 숨 쉬듯 아침 차 시동 소리가 들리고, 햇살은 벌써 줄을 서서 커피를 기다리고 있는 차들을 스치며 가게들의 화장기 없는 얼굴마저 드러내 버린다. 어둠을 빠져나온 도로에는 차들이 흐른다.     흐르는 것이 차뿐이랴. 벽두부터 가족을 위해 일터로 나서는 가장의 마음도 흐르고, 가뜩이나 움츠린 경기에 하루라도 문을 열어야 하는 주인들의 기대도 흐른다. 운전대를 잡은 손 위에는 올해는 그래도 나아지려나 하는 마음이 내려앉는다. 이렇게 새해의 도시는 흐르고 변하고 춤을 춘다.   그런데 모든 것을 춤추게 만든 태양은 담담하게 새벽 공기를 가르며 솟아오를 뿐이다. 변하지 않고 떠오르는 아침 해가 있기에 세월은 흐를 수 있고, 세상은 춤출 수 있다. 물은 급하게 흘러도 여울에 비친 달은 그 물에 떠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도 많은 것이 흐른다. 코로나 속보로 보기 싫은 숫자들이 도표 위에 흐르고, 아침부터 전화기에는 좋건 싫건 문자 메시지가 화면 위를 흐른다.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는 세월이 흐르고 무심한 마음도 함께 흐른다. 급하게 흐른다. 자칫 물만 쳐다보다가 나도 몰래 나 자신을 무심한 마음과 함께 퍼다 버릴 정도로 쏜살같이 흐른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치고 들어온 물살에 빠져 놀라기보다, 흐르는 모든 것을 춤추게 하시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물결이 요란할수록 아침 햇살은 바다와 도시를 황홀하게 춤추게 한다. 잔잔하다면 고요하고 평화롭게 물들게 한다. 인생과 세상이 혼탁하게 흘러도 하나님은 담담히 여기 계시며 말씀하신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당신의 운전대는, 문을 연 가게는, 땀을 흘리는 일터는 흘러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은 당신을 물들일 것이다. 아름답고 황홀하게. 담담하고 열렬하게. 자, 이제 우리가 춤출 때다. 하나님의 따스한 마음으로 나와 이웃의 삶을 물 들이며 물결을 타고 춤을 출 때다.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새해 일상도 새해 그리피스 천문대 시동 소리

2022-01-17

[등불 아래서] '뚤레뚤레' 하나님

 어린 시절 동네 어디에나 모래를 쌓아놓은 곳이 있었다.     나중에야 한창 경제 개발로 건축이 붐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이에게는 찾기 쉬운 놀이터였을 뿐이었다. 하얀 고무신을 구겨 만든 자동차로 길을 만들고 고사리손을 넣어 집을 지었다. 아마도 이때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노래도 자연스레 배웠던 것 같다. 어떤 아이는 까치야 까치야 헌이 줄게 새이 다오 라고 추임새처럼 넣기도 했지만 도시에 살아서인지 아무도 이 노래를 끝까지 알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헌집을 줄테니 새집달라는 말이 얼마나 억지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눈가에 미소가 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웃음을 나게 한 것은 나중에 알게 된 다음 소절들이었다. 두껍아 두껍아 물 길어오너라 / 두껍아 두껍아 너희 집 지어줄게 / 두껍아 두껍아 너희 집에 불났다 쇠스랑 가지고 뚤레뚤레 오너라.   정말 끝까지 두꺼비를 우려먹는 노랫말이 아닌가. 새집을 받아놓고는 두꺼비에게 집 지어준다고 물 길어오라 시킨다. 불난 집은 너희 집이라고 말하면서 오라고 부른다. 부르는 이의 낯은 정말 두껍고 달려오는 두꺼비는 참 속도 없다.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 나도 그리고 우리 얼굴도 무척이나 두껍다. 무너져 버릴  헌집을 주어버리고 새집을 받은 것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모두라고 생각하고 시기와 경쟁 속에 일희일비하며 살던 우리에게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해 주신 분이 계시다.  헌집은 가져가시고 대신 새집을 주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며 새로운 시민권이며 새로운 인생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집 하나 줘서 내보낸 것이 아니었다. 애물단지 하나를 끼고 집을 지으신다. 새집을 위해 하나님은 물을 길어 진흙을 빚고 우리와 함께 벽돌을 쌓아주신다.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불러댄다.   어느 날 새집에 불이 났다. 역시 아버지가 제일 먼저 오셨다. 뚤레뚤레 오셨다. '뚤레뚤레'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는 둘레둘레의 방언이다. 새집으로 바꿔주고 새집을 지어주고는 불이 나자 제일 먼저 불을 끄려고 자기 집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달려오시는 뚤레뚤레 아버지가 눈앞에 겹쳐 보인다. 불난 곳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깊은 속까지 두리번거리시며 살피신다. 어디라도 다쳤을까 우리만 보신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불 속이라도 성큼 들어오셔서 우리를 안으신 아버지. 어찌 사랑치 않으랴. 어찌 감사치 않으랴.   sunghan08@gmail.com 한성윤 / 목사ㆍ나성남포교회등불 아래서 하나님 대신 새집 경제 개발 애물단지 하나

20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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